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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시인 허난설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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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허난설헌생가터 写真:JeongGyu Gim (김 정규)江陵市 |
비통한 생각에 깊디 긴 밤을 며칠 새우고 새벽을 맞이한 경험은, 남의 아픔도 자기의 것으로 하게 하고 사람을 성숙시켜, 때로는 뛰어난 예술 작품을 탄생시키는 경우도 있다. 조선을 대표하는 여성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 은 어린 시절부터 시의 재능을 발휘하여 자신의 속마음을 담은 시뿐만 아니라,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이나 사회의 불합리에도 마음을 쓰는 시를 많이 썼다. 이제서야 밤하늘의 샛별처럼 빛을 발하는 시인 허난설헌. 사후, 방 하나 가득 채울 정도의 수많은 시와 문장을 남긴 그녀의 생애는 어떤 것이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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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許蘭雪軒)과 동생 허균(許筠)의 생가인 고택(古宅) |
재작년 여름 더위가 한창였던 8월초, 한국 강원도를 여행한 나는, 머물렀던 강릉(江陵)의 선교장(船橋莊)에서 허난설헌과 그 동생인
허균:許筠(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의 저자이고 사상가・정치가)의 생가터와 기념관(記念館)을 찾아갔다. 36도를 넘는 더위 속에 찾은
그 생가는 소나무 향기가 가득한 솔밭으로 둘러싸여 호젓한 모습으로 내 눈앞에 나타났다. 허난설헌(1563-1589)은 조선왕조의 문화가 절정이였던 16세기 신사임당(申師任堂) 황진이(黄真伊)와 거의 동시대에 살았다. 시와 문장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일본역사에 있어서의 무라사키시키부(紫式部: 일본최초의 여성소설가)에 비유되는 천재시인이다. 본명은 허초희(許楚姫), 오랫동안 고위 문신(文臣)으로 요직을 맡은 초당 허엽(草堂・許曄)을 아버지로, 그 당시의 여성으로서는 파격적인 학문을 익히며 자랐는데, 16살때 가문은 양반(兩班:귀족계급)이라고 하나 생가의 지적인 분위기와는 꽤 다른 가풍의 집에 시집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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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허초희)상 와 생가터 한옥실내 |
한 살 연상인 남편 김성립(金誠立)은 홍문관(왕궁 서고에 보관된 도서의 관리를 맡은 조선의 행정기관 및 연구기관)에서 시문저술 일을 하고 있었는데, 재능 있는 아내를 질투해서 사관으로써 임지에 부임한 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시집간지 10년 사이에 아이 둘을 연달아 잃고, 유교를 세상의 계명으로 하는 시어머니의 엄숙한 시선과 태도로, 좋아하는 독서와 시작(詩作)도 뜻대로 할 수 없는 시집의 분위기 속에서 그녀의 고독감은 조금씩 절망으로 변해갔다. 그 절망이 그녀의 몸을 해친 탓인가. 26세의 약관(弱冠)에 난설헌은 병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자유분방하게 남성을 사랑하며 살았던 동시대의 시인(기생) 황진이(黄真伊)와는 달리 양반계급 출신인 지성 있는 시인이지만, 아내를 멀리(질투)해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사모해 고독한 나날을 보낸 한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불합리한 삶을 그 시대 유교사회의 엄격한 관습 가운데 조선 여성으로써 요구되는 지조와 품성을 지키며 살아온 시인이었다. 보상받을 수 없는 허난설헌의 인생을 생각할 때, 어린 시절에 읽은 구약성경 속의 「욥기(Job)」가 떠오른다. 기독교신자가 아닌 나에겐 어학을 공부하기 위한 교재였을 뿐이었는데 그 내용은 마음속 깊이 새겨졌다. 「비록 아무도 나를 고통에서 구해주지 않더라도 신(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생명의 마지막 날까지 감수한다.」 이 스토리를 젊은 나는 그렇게 이해했고, 그것이 (교훈으로) 지금까지 내 인생의 지주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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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蘭雪軒(허난설헌)의 생가 터를 둘러싼 솔밭. 걸어가면 소나무 향기에 마음이 편안해 진다. |
유배당한 오빠를 생각하며, 그 비참함과 분노의 심정을 담은 시와 사회의 모순에 눈을 돌려 호소하려고 하는 시와는 달리, 여성으로써 애처로움을 그리게 하는 시가 있다. 月樓秋盡玉屏空(월루추진옥병공) 霜打蘆洲下暮鴻(상타로주하모홍) 瑤必一彈人不見(요필일탄인불견) 藕花零落野塘中(우화영락야당중) 달뜬 다락에 가을은 깊고 옥병풍은 텅 비었는데 서리 내린 갈대밭에 늙은 기러기 내려 앉았네. 아름다운 거문고를 튕기는데 사랑하는 사람 없고 연꽃은 시들어 들판 연못 가운데 떨어지네. 소식 없는 남편을 기다리는 아픔이 이 시가 된 것일까….. 나이들은 지금, 허난설헌의 인생을 생각할 때, 그녀의 심적 고통과 아픔이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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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마음을 토로하고 적지 않을 수 없었던 한 사람의 여성. 죽음 앞에서 나날의 생각과 느낀 점을 적어둔 한 방 가득한 분량의 시
전부를 태워 버리라고 했다고. 적나라한 심정을 적은 문장을 남기는 것을 꺼려한, 자긍심 높은 조선 여성의 향기로운 영혼이 느껴진다. 허난설헌 사후 17년, 남동생 허균과 친했던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들이 그 詩稿(시의 초고)를 가지고 귀국, 중국에서 「許蘭雪軒集」으로 발간되어 널리 반향을 불렀다. 한국에 전해지는 「난설헌집」은 동생 허균이 정리 편집한 것이고, 허균의 반역죄라는 처형사건 후, 우여곡절을 거처 74년 후 부산 동래에서 한국 최초의 「난설헌집」으로 시집이 출간되게 이르렀다. 이 시집은 무역으로 부산에 드나든 일본의 사신들과 상인들을 통해서 일본에 전해지고 간행(1711년)되어 널리 읽히게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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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터 입구에 있는 기념관 남동생이자 정치가,사상가,소설가인 허균과 가족들의 자료도 함께 전시되어있다 |
남편의 옹졸함을 허난설헌의 불운이라고 말하기는 쉽겠지요. 난설헌의 남편 김성립에 견고한 유교사회에 있어서 가장으로 필요한 위대함과 남자다움이 요구되면서도 사람으로서의 섬세함과 약함을 안고 있는 평범한 남자의 모습을 느낀 사람은 나만일까. 귀가 한 집에서 시작(詩作)에 몰입하는, 자신보다 재능있는 아내의 모습을 눈앞에 두어 휴식보다 때론 열등감과 딱딱함, 허정함을 느낀 것이 아니였을까... 엇갈리는 남자와 여자의 슬픔은 치유 될 수는 없었다 강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남성상. 순종으로 맹종함을 미덕으로 삼는 당시의 여성상… 남자도 여자도 그것으로 수호되면서, 한편 그 가치관에 구속되어 고통과 슬픔을 견디며 살아가야 됐음도 확실한 것이었겠다. 남녀의 사랑이라는 게 두 사람만의 사랑으로만 성립되고 지속되기엔 너무나 여리고 약한 것이 아닐까? 허난설헌(許蘭雪軒)이라는 천재시인의 뒷모습에, 고독속에 혼자 남겨지면서도 늠름하고 품위 있게살아온 여성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것이 그녀의 생가 터 구석에 조용히 꽃 피우는 연분홍색 상사화 같기도 하고, 집 주위를 둘러싸고 풍기는 소나무 향기 같기도 했다. *참고 약관(弱冠): 1. 스무살(20세)을 달리 이르는 말 2. 젊은 나이 吉田美智枝 by Michie Yoshid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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