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5 女性の刺繍に託した思い
4 ソウル’88オリンピック
   (3)허난설헌 
3  女性シリーズ
(3)
許蘭雪軒 
   (2)황진이   
2  女性シリーズ
(2)
黄真伊 
  
  (1)신사임당   
1 女性シリーズ
(1)申師任堂
 
   
비운의 시인 허난설헌
허균,허난설헌생가터
 写真:JeongGyu Gim (김 정규)江陵市

비통한 생각에 깊디 긴 밤을 며칠 새우고 새벽을 맞이한 경험은, 남의 아픔도 자기의 것으로 하게 하고 사람을 성숙시켜, 때로는 뛰어난 예술 작품을 탄생시키는 경우도 있다.

조선을 대표하는 여성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 은 어린 시절부터 시의 재능을 발휘하여 자신의 속마음을 담은 시뿐만 아니라,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이나 사회의 불합리에도 마음을 쓰는 시를 많이 썼다.

이제서야 밤하늘의 샛별처럼 빛을 발하는 시인 허난설헌. 사후, 방 하나 가득 채울 정도의 수많은 시와 문장을 남긴 그녀의 생애는 어떤 것이었을까.
 
 허난설헌(許蘭雪軒)과 동생 허균(許筠)의 생가인 고택(古宅)
재작년 여름 더위가 한창였던 8월초, 한국 강원도를 여행한 나는, 머물렀던 강릉(江陵)의 선교장(船橋莊)에서 허난설헌과 그 동생인 허균:許筠(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의 저자이고 사상가・정치가)의 생가터와 기념관(記念館)을 찾아갔다. 36도를 넘는 더위 속에 찾은 그 생가는 소나무 향기가 가득한 솔밭으로 둘러싸여 호젓한 모습으로 내 눈앞에 나타났다.

허난설헌(1563-1589)은 조선왕조의 문화가 절정이였던 16세기 신사임당(申師任堂) 황진이(黄真伊)와 거의 동시대에 살았다. 시와 문장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일본역사에 있어서의 무라사키시키부(紫式部: 일본최초의 여성소설가)에 비유되는 천재시인이다.

본명은 허초희(許楚姫), 오랫동안 고위 문신(文臣)으로 요직을 맡은 초당 허엽(草堂・許曄)을 아버지로, 그 당시의 여성으로서는 파격적인 학문을 익히며 자랐는데, 16살때 가문은 양반(兩班:귀족계급)이라고 하나 생가의 지적인 분위기와는 꽤 다른 가풍의 집에 시집갔다. 
 
 허난설헌(허초희)상 와 생가터 한옥실내

한 살 연상인 남편 김성립(金誠立)은 홍문관(왕궁 서고에 보관된 도서의 관리를 맡은 조선의 행정기관 및 연구기관)에서 시문저술 일을 하고 있었는데, 재능 있는 아내를 질투해서 사관으로써 임지에 부임한 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시집간지 10년 사이에 아이 둘을 연달아 잃고, 유교를 세상의 계명으로 하는 시어머니의 엄숙한 시선과 태도로, 좋아하는 독서와 시작(詩作)도 뜻대로 할 수 없는 시집의 분위기 속에서 그녀의 고독감은 조금씩 절망으로 변해갔다. 그 절망이 그녀의 몸을 해친 탓인가. 26세의 약관(弱冠)에 난설헌은 병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자유분방하게 남성을 사랑하며 살았던 동시대의 시인(기생) 황진이(黄真伊)와는 달리 양반계급 출신인 지성 있는 시인이지만, 아내를 멀리(질투)해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사모해 고독한 나날을 보낸 한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불합리한 삶을 그 시대 유교사회의 엄격한 관습 가운데 조선 여성으로써 요구되는 지조와 품성을 지키며 살아온 시인이었다.

보상받을 수 없는 허난설헌의 인생을 생각할 때, 어린 시절에 읽은 구약성경 속의 「욥기(Job)」가 떠오른다. 기독교신자가 아닌 나에겐 어학을 공부하기 위한 교재였을 뿐이었는데 그 내용은 마음속 깊이 새겨졌다.

「비록 아무도 나를 고통에서 구해주지 않더라도 신(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생명의 마지막 날까지 감수한다.」 이 스토리를 젊은 나는 그렇게 이해했고, 그것이 (교훈으로) 지금까지 내 인생의 지주가 되었다.
 
  許蘭雪軒(허난설헌)의 생가 터를 둘러싼 솔밭.
걸어가면 소나무 향기에 마음이 편안해 진다.
유배당한 오빠를 생각하며, 그 비참함과 분노의 심정을 담은 시와 사회의 모순에 눈을 돌려 호소하려고 하는 시와는 달리, 여성으로써 애처로움을 그리게 하는 시가 있다.

月樓秋盡玉屏空(월루추진옥병공)
霜打蘆洲下暮鴻(상타로주하모홍)
瑤必一彈人不見(요필일탄인불견)
藕花零落野塘中(우화영락야당중)

달뜬 다락에 가을은 깊고 옥병풍은 텅 비었는데
서리 내린 갈대밭에 늙은 기러기 내려 앉았네.
아름다운 거문고를 튕기는데 사랑하는 사람 없고
연꽃은 시들어 들판 연못 가운데 떨어지네.

소식 없는 남편을 기다리는 아픔이 이 시가 된 것일까…..
나이들은 지금, 허난설헌의 인생을 생각할 때, 그녀의 심적 고통과 아픔이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다.
속마음을 토로하고 적지 않을 수 없었던 한 사람의 여성. 죽음 앞에서 나날의 생각과 느낀 점을 적어둔 한 방 가득한 분량의 시 전부를 태워 버리라고 했다고. 적나라한 심정을 적은 문장을 남기는 것을 꺼려한, 자긍심 높은 조선 여성의 향기로운 영혼이 느껴진다.

허난설헌 사후 17년, 남동생 허균과 친했던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들이 그 詩稿(시의 초고)를 가지고 귀국, 중국에서 「許蘭雪軒集」으로 발간되어 널리 반향을 불렀다.

한국에 전해지는 「난설헌집」은 동생 허균이 정리 편집한 것이고, 허균의 반역죄라는 처형사건 후, 우여곡절을 거처 74년 후 부산 동래에서 한국 최초의 「난설헌집」으로 시집이 출간되게 이르렀다.

이 시집은 무역으로 부산에 드나든 일본의 사신들과 상인들을 통해서 일본에 전해지고 간행(1711년)되어 널리 읽히게 됐다.
생가터 입구에 있는 기념관
남동생이자 정치가,사상가,소설가인 허균과 가족들의 자료도 함께 전시되어있다 

남편의 옹졸함을 허난설헌의 불운이라고 말하기는 쉽겠지요. 난설헌의 남편 김성립에 견고한 유교사회에 있어서 가장으로 필요한 위대함과 남자다움이 요구되면서도 사람으로서의 섬세함과 약함을 안고 있는 평범한 남자의 모습을 느낀 사람은 나만일까.
귀가 한 집에서 시작(詩作)에 몰입하는, 자신보다 재능있는 아내의 모습을 눈앞에 두어 휴식보다 때론 열등감과 딱딱함, 허정함을 느낀 것이 아니였을까... 엇갈리는 ​​남자와 여자의 슬픔은 치유 될 수는 없었다

강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남성상. 순종으로 맹종함을 미덕으로 삼는 당시의 여성상…
남자도 여자도 그것으로 수호되면서, 한편 그 가치관에 구속되어 고통과 슬픔을 견디며 살아가야 됐음도 확실한 것이었겠다.

남녀의 사랑이라는 게 두 사람만의 사랑으로만 성립되고 지속되기엔 너무나 여리고 약한 것이 아닐까?

허난설헌(許蘭雪軒)이라는 천재시인의 뒷모습에, 고독속에 혼자 남겨지면서도 늠름하고 품위 있게살아온 여성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것이 그녀의 생가 터 구석에 조용히 꽃 피우는 연분홍색 상사화 같기도 하고, 집 주위를 둘러싸고 풍기는 소나무 향기 같기도 했다.

*참고 약관(弱冠):
1. 스무살(20세)을 달리 이르는 말 2. 젊은 나이 


                  吉田美智枝 by Michie Yoshi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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